복을 부르는 믿음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얼마든지 우리도 복을 부르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볼까요? 우리는 대부분 영혼의 만족을 주는 환경보다 육신의 만족을 주는 환경에 더 집중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을 놓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 말씀이 더 좋은 환경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더 좋은 환경이 우리의 영혼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그 이유를 살펴봅시다. 아비멜렉과 평화협정을 맺은 후에 아브라함은 블레셋 땅 브엘세바에 계속 머뭅니다. 브엘세바는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나 불편하고 힘든 곳입니다. 반면, 아비멜렉이 살고 있던 그랄은 브엘세바 보다 비가 더 많이 내리고 블레셋 평야와 가까운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그냥 머뭅니다. 왜 아브라함은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요? 그랄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면 안되는가요? 땅 살 돈이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물질에 충분히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아브라함은 브엘세바로 이사 오기 전 그랄에 살았었습니다. 그랄은 여러 면에서 브엘세바 보다 훨씬 사람이 살기에 더 좋은 곳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랄의 문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브엘세바는 육신적으로는 힘들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거룩한 장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좀 더 잘 살고 싶은 욕구를 의지적으로 내려놓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을 잃지 않도록 은혜 받는 환경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육신의 만족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영혼의 안전함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복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문제를 해결한 아브라함은 자신이 거주하는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습니다. 에셀 나무는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고 물을 흡수하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잘 자라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입니다. 특이한 점은 그 잎이 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짠 잎의 성분은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해서 새벽에는 잎 위에 이슬이 맺히게 만듭니다. 이 이슬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한 낮에 증발하면서 에셀 나무 밑의 온도를 주변보다 10도 정도 낮추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쉼터를 제공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에셀 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뜻입니다. 자,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를 심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하나님을 찬양했을까요?
그것은 브엘세바를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영원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마음 속에 현재 누리는 복에 만족하지 않고 영원하신 능력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복의 문을 천국에 갈 때까지 열고 있는 사람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영원한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신이 받은 은혜와 삶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일시적인 육신의 복보다 심판 날에 완성될 완전한 영적인 복에 더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아브라함처럼 이전의 부끄러운 삶은 모두 벗어버리고, 복의 대명사가 되어 하나님의 복을 나눠주면서 사는 행복한 크리스천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