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이 선한 이유는 강도 맞아 반쯤 죽어가고 있던 그를 보고 불쌍히여겨 온갖 치료와 필요를 충족해주고 차후의 비용까지도 책임져주는 그 마음 때문입니다. 생면부지였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원수로 취급하던 이스라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기에 자비를 베푼 것입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splagchnizomai 인데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똑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사마리아인은 보았고 ‘불쌍히 여기며’ 의 차이 입니다. 원어론 내장, 즉 심장, 폐, 간, 그리고 콩팥, 고대에 감정의 근원이라고 생각되는 내장을 뜻하는 ‘스플랙니조마이’라는 단어로서 내장이 뒤 틀릴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 행동으로 옮길 수 밖에 없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옛 헬라어 극작가들이 재갈을 물고 전쟁에 뛰어들어 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군마들을 묘사할 때 사용하던 단어이며 신조와 감정과 행동이 포함된 단어입니다. 복음서에 12번 사용된 잘 아는 단어로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죄와 사망으로 고통받는 저희와 함께 하시 길 위해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시고 저희와 함께 고난을 받으사 저희를 자유케 해 주신 Compassion 말 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처럼 빈곤과 절망의 사슬에 묶여 고통하는 제 3세계의 어린이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 후 41년 동안 한국 고아들을 섬겼듯이 컴패션의 구제와 양육은 그 지역 환경과 상황을 제일 잘 아는 현지 지역교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무리 선한 뜻을 가지고 도우려고 했어도 역부족이였던 현지의 실정을 여관이 담당 했듯이 현지 교회가 바로 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현지의 교회가 파트너가 되어서 후원자님들의 후원금으로 굶주리고 헐벗고 소망을 잃은 현지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자립할 수 있게 돌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원자님들은 그 어린이들이 전인적으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멀리서 나마 편지와 기도를 통해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알아가는 오늘의 예배, 말씀을 통해 저희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마칩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어떤 이웃을 만나길 원할까요? 죽어가던 한국 고아들을 위해 긍휼의 손을 펼친 스완슨 목사님이나 현재 세계 220만명의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는 컴패션 후원자님들과 같은 선한 사마리아인들을 만나시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우리 주위에 어떻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이신 우리 주님과 함께 꿈과 소망과 미래가 없이 살아가는 3세계의 어린이의 손을 잡아주심으로 저들의 이웃이 되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는 주만높이는교회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