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론의 꽃
꽃마다 이름과 고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샤론의 꽃은 어떻게 생겼고 무슨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사실 성경에 ‘샤론의 꽃’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심지어 한글 성경에는 샤론이 아니라, 사론이 8번 기록돼 있습니다. 그럼 사론은 뭘까요? 사론은 지중해 근처에 있는 욥바에서부터 갈멜산까지 펼쳐진 큰 해안평야입니다. 사론평야 남쪽은 풀이 많아서 양을 치는 목축업이 잘됐습니다. 사론 평야의 북쪽은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아주 잘됐습니다. 사론 평야에는 아름다운 꽃들도 많았고, 오렌지 같은 과일들도 많이 열렸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나는 사론의 수선화”에서 수선화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하바�f레트’입니다. 하바�f레트는 들판에 흔하게 피어 있는 들꽃,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못 받는 들백합화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사론의 수선화’라는 말씀은 ‘나는 화려한 꽃들이 많은 사론에 흔하게 피어 있는 들꽃처럼,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예쁘고 가문 좋고 능력 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외모도 볼품 없고, 가문도 별로고 뛰어난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는 뜻입니다. 아가서를 살펴보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에서 ‘나’는 솔로몬이 사랑하는 술람미 여인입니다. 아가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인간들을 구원하러 세상에 올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솔로몬이 사랑하는 여자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을 사랑할까요? 솔로몬이 어떤 여자를 사랑했는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사랑했던 술람미 여인은 잇사갈 지파의 수넴이라는 마을에 살았던 여인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작고 유명하지도 않고, 특별한 능력도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고상하게 꾸미고 즐기면서 사람들에게 대접 받으며 사는 여자가 아니라, 허름하고 더러운 노동복을 입고 일에 치여서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며 사는 여자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지혜롭게 자신의 것을 잘 챙기는 여자가 아니라, 실수도 저지르고 손해도 보면서 사는 여자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오빠들의 일을 하느라고 자기의 재산도 제대로 못지키는 여자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는 좋은 환경에 사는 여자가 아니라, 식구들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하면서 살아야 하는 여자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사론 평야에 피어 있는 화려한 꽃들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사람들에게 관리를 받는 귀한 꽃이 아니죠?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못 가진 들꽃 같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술람미 여자가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라고 칭찬했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자를 가시처럼 고통스런 환경에 살고있어도 백합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솔로몬은 후궁 700명과 첩 300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와이프들은 다른 나라의 공주들과 귀족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많이 배웠고, 돈도 많고, 화려하고, 솔로몬에게 도움이 될 말한 든든한 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을까요? 예수님이 술람미 여인처럼 불쌍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잘 생기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는 죄인들 모두를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별 볼 일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사는 고아나 과부같은 연약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먹고 사느라 일에 치이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며 사는 상처입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실수를 저지르고 손해를 보며 사는 부족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건강과 마음이 무너져가는데도 식구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죄의 짐에 눌려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힘들고 문제 많은 상황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수고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그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문제 많은 상황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기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사론의 꽃입니다. 우리가 바로 골짜기의 수선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가시 나무 가운데 백합화로 부르시며 당신의 신부로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으로 떨어질 죄인이었는데도 우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로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사론의 꽃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